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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STORY

사진_윤재경    |   글_이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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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을 벗겨 놓았을 때

 

1. 

나는 자는 것, 먹는 것과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내 생각에 이 두 가지는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때에 따라서 조절할 수는 있겠지만 이 두 가지와 어떤 ‘관계’에 놓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대가는 매우 혹독하다. 우선 자는 것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는 한때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내 몸은 잠을 미루고 미루다가 거의 기절하듯 잠들어서는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나를 깨웠다. 나는 방금 이상한 문장을 썼다. 내 몸이 나를 깨웠다고. 그러고 나서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침대에서 뒤척거린다. 곧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물론 정신이 맑지 않으니 실수가 많다. 표정은 더 어두워지고, 잠을 자지 못하는 것에도 낮에 계속 실수를 하는 것에도 계속된 실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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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먹는 것과는 어떠한가? 지금은 규칙적인 식습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비교적 순조롭지만, 한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목 끝까지 음식을 밀어 넣었다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남들의 눈을 피해 아주 은밀하게 진행된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다시 평범한 식습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자는 것과 먹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글쓰기를 잠시 쉬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일들을 한다. 작은 신호들을 그냥 넘겼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두 가지에서 동시에 문제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에 20대로서 가장 불안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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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그때에 20대로서 가장 불안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내가 이 문장을 쓰면서 얼마나 안도하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이제 20대에서 벗어났다는 기쁨, 작지만 확실한 나의 영역이 생겼다는 기쁨이 나를 재우고 먹인다.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유는 겪어야만 했던 일을 겪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왜냐면 나는 이 시기를 통과하면서 작가가 되었다. 나는 오래전 선생님의 문장을 기억한다. 글을 쓰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는 문장이었다. 그때의 나는 도대체 그 둘이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고, 일견 작가를 너무 특수한 존재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감히) 어색했다. ‘겪어야만 했던 일을 겪었다는 생각’이라는 문장이 많은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4. 

하필 내가 글을 선택했고 지금 작가일 뿐이다. 나는 어떤 일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잔인하게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내 등단작 <백색소음>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은 나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잔인하게 찾아왔다. 나는 그 시에 짙게 깔린 불면의 느낌이 마음에 든다. 그건 정말 내가 겪을 수밖에 없던 일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길을 가다 벗겨진 마네킹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했을 때의 내 몸을 기억했다. 뜨거운 한 낮에도 나만은 불이 꺼진 듯 했다. 이제 내가 버려진 마네킹들을 보며 느끼는 것은 홀가분하다는 감정이다.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그냥 벗겨진 채 멀뚱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속 멀어지는 어떤 여자의 치마가 내 시선을 오래 잡아끈다. 바람이 불면 치마가 흔들리듯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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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잊어주길

 

1.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 사람들이 스스로의 에픽 (epic) 을 말할 때 시작점은 어디 있을까? 내 경우는 대전 계룡산 근처의 무당집이다. 우리 집은 아들이 간절하다. 장남(아버지)의 장남(아들)이 필요하다. 첫째는 딸이니 둘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이어야 했지만 내가 태어나버렸고 아버지는 딸 둘의 아버지가 되었다. 다소 허탈한 미소를 지을 수는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딸들에게 정성을 다한다. (물론 자기 방식대로. 나중에 이 방식은 둘째 딸이 사춘기일 때와 서른을 막 넘겼을 때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친할머니는 내키지 않지만 둘째 손녀의 운명이 궁금해 단골 무당집을 찾아간다. 무당은 나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듣더니 침착하게 종이에 적고 눈을 감는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그들에게는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겠지만 제3자의 눈에는 혼잣말로 보인다.) 눈이 먼저 떠지고 이윽고 입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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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론 위의 이야기는 내가 들은 것과 내가 느낀 것을 나름의 비율로 섞어 만든 허구다. 그 무당집이 계룡산 근처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용하다면 어째서 내가 아들인지 딸인지 미리 할머니에게 일러주지 않았는지 따져 묻고 싶다. 내 탄생만으로 누군가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는 사실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물론 극복하고 웃어넘길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극복하기 싫은 일도 있는 법이다.) 이 모든 것과는 별개로 무당의 입을 통해 나온 문장은 어쩐지 찜찜하게 내 인생에 관여한다. 나는 일이 잘 풀릴 때 혹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문득 그 문장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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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시집을 내고 나서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나의 이력을 매우 어색해 한다는 사실이다. 1990년에 대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복기하면 할수록 나에게 멀어진다. 나는 6살에 광주로 이사를 왔다. 나의 모든 사회화 과정은 광주에서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구나 그렇듯 6살 이전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광주에서의 첫 기억은 단절이다. 잠시 머물렀던 이모의 집을 떠나 처음으로 살게 된 광주의 집이 기억난다. 부모님은 이사 중에 현관 앞에 아무렇게나 짐을 부렸고, 나는 그 짐들과 구분 없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리가 아파서 이불 짐에 잠시 앉아있었다. 아들이 아니라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주 본능적인 사랑을 받았던 장소에서 쫓겨난 것이다. 더군다나 부모님은 바쁘셨다. 어떻게든 낯선 도시에서 자리를 잡아야했고 둘째 딸에게 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부모님과 학교의 관심 밖에 있었던 2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2년의 기억은 모두 휘발 되었다. 부모님의 말을 따르자면 그 2년 동안에도 질문에 대답도 곧 잘 하고 학원도 다녔다는데 (그래서 한글을 떼고 학교에 입학했는데) 말끔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사 짐에 앉아 있던 장면 바로 다음 장면은 초등학교 입학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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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러면 내 에픽(epic)에 문제가 생긴다. 훌륭한 시인이 되면 사람들이 나를 인터뷰 할 텐데, 그때에 해줄 말이 필요하다. 나는 주로 이런 공상을 하면서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다보면 사주풀이를 한다거나 ‘영으로 봅니다’라는 깃발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대전과 광주 사이에 그어진 커다란 빗금이 떠오른다. 같이 산책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할머니가 찾아간 무당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진 속 강아지처럼 주인의 행선지에 무관심하고 싶지만 나는 항상 그 날의 무당집에 어색하게 한 쪽 발을 딛고 있는 기분이다. 실제로 가본 적도 없고 할머니와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눌 관계도 아니니, 나는 산책하다 마주치는 모든 무당집이 그날의 그 무당집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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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래서 진짜 애기동자가 있다면 불쑥 문을 열고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내가 나의 탄생에서 너무 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질문을 해야 옳을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근처에 비슷한 분위기에 무당집이 있던데 혹시 그를 경쟁자로 느끼시나요?’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나에 관한 첫 예언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리. 혹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사자인 나와 함께 가볍게 잊어주길. 

                                                           

 

 

 

 

 

 

 

 

 

 

 

 

 

 

 

 

 

 

 

 

 

 

 

 

 

 

 

스카이 라인

 

 

1.

2020년 광주에 사는 나조차도 ACC(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물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몇 가지를 뽑아보자면 일단 시각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ACC의 건물들은 아주 낮은 지대에 지하층부터 시작한다. ACC 주변에는 전일빌딩과 상무관이 있다. ACC의 건물을 차마 높이 올리지 않는 (혹은 못하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전시를 관람하거나 산책을 하러 일부러 내려가지 않는 이상 ACC 주변을 지나간다 해도 건물 자체를 보기 힘들다. 두 번째 이유가 있다면 ACC 건물을 짓기 위해 공사 중이었던 시간이 매우 길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에게 그 공간은 ACC 건물로 떠올려지기 보다는 ACC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를 하는 공간으로 떠올려진 다는 것이다.

 

 

2.

내 기억에 공사가 중단되었던 기간이 있었다. 무슨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충장로를 맞대고 있는 공간이 공사 가림막에 둘러싸여 꽤 오랜 기간 동안 방치 되는 일은 퍽 답답한 일이다. 그래서 처음 ACC 건물과 조형물을 봤을 때 아름다움은 차치하고 완공되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사진 속 건물은 ACC 부지에 속하여 철거 중이다. 하지만 사진 속 진짜 주인공은 나무의 그림자인 것 같다. 땅의 영역과 가림막의 영역에 넓게 펼쳐진 나무 그림자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3.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내 생각일 뿐이다. 이 사진에 없는 나무를 상상해본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을 것 같다. 바람이 불어서 나무는 많이 흔들렸을 것이다. 나무가 흔들리니 나무 그림자도 당연히 흔들릴 것이다.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는 나무가 아닌 것들의 경계를 흐리면서 흔들린다.

 

 

4.

여기서 질문, 나무의 그림자까지 나무일까? (혹은 나무의 영역으로 보아야 하나?) ACC의 건물이 높지 않아서 탁 트인 하늘도 ACC 건물의 영역으로 보아야 하나? ACC의 건물이 잘 떠오르지 않는 세 번째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건물이 높지 않으려면 긴 복도 같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맑은 날에 ACC 건물을 산책하고 있으면(흐린 날에는 잘 걷지 않는다.) 맑은 하늘에 짓눌린 형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맑은 하늘까지 ACC 인가? 아니면 맑은 하늘이 ACC를 가지고 있나? 나는 공연히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함께 걷기, 따라 걷기, 혼자 걷기

 

 

 

1.

당신은 연인과 함께 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단은 연인이 있었는지 물어보라며 항변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연인과 함께 걷는다고 상상해보자. 날은 좋고 바람은 산뜻하게 불어온다. 맞잡은 손이 간질거린다. 눈을 마주쳐도 좋고 같은 풍경을 보며 대화를 나눠도 좋다. 그저 손잡고 같은 길을 걸을 뿐인데, 겨우 산책인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느낀다. 그러다 갑자기 함께 걷던 길이 좁아진다. 그는 손을 놓고 먼저 당신을 앞질러 간다. 따라오는 눈짓과 함께. 함께 걷던 길은 다시 넓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이 겨우 손에 닿을 듯하다. 그를 따라 걸으며 미묘하고 수동적인 상태에 처해진다. 무엇이라도 잡고 싶은데 그의 옷자락을 잡는 것을 내가 나에게 허용하고 싶지 않다. 불편한 균형이 자리 잡는다.

 

2.

함께 걷다가 따라 걷게 되는 순간을 조금 엄살 보태어 써봤다. 나는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오래 걷기를 한다. 생각에 생각을 보태던 머리가 잠시 쉬면서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음이 나를 옮긴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적어도 두 시간은 걸어야 그런 감각이 찾아온다. (말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만 그렇게 걷는 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누워 보내기 때문에 이 정도는 걸어야한다는 의무감도 작동한다.) 누군가에게 오래 걷기에 동참해달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대부분 혼자 걷게 된다. 놀랍게도 잡생각이 사라지고 정말 해야 할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걷기의 효능을 믿는 편이다. 혼자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결심한 것들이 내 인생에 몇 개의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3.

나는 레베카 솔닛을『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으로 처음 접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훌륭한 에세이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레베카 솔닛은 미궁과 미로에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미로는 복잡하지만 하나의 벽을 따라가면 하나로 이어져 있고 결국에는 중심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궁은 다르다. 중심이 없을뿐더러 길은 자주 끊긴다. 미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미궁 자체에 대해서 즐거워해야 한다. 레베카 솔닛은 지금의 자신의 길이 미로인지 미궁인지 고민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4.

내가 서 있는 곳이 미로일지, 미궁일지 가끔 생각한다. 미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미궁을 즐겨야 한다니. 내가 써놓고도 잔인한 문장에 마음이 추워진다. 시각적으로 막힌 공간 없이 시원하게 뚫린 길을 걸어도 내 걸음이 막히는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비로소 여기가 어디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투명한 비닐 벽이 만들어져 있고 그 너머로 어린아이의 실루엣이 살짝 보이는 사진에 내가 마음을 뺏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내가 걷거나, 걷는 사람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5.

사진 안에 꽤 많은 수직선이 있다. 비닐 벽과 연관이 없어 보이는 수직선들도 사진 안에 들어와 있다. 심지어 나무들도 이 사진 속에서는 수직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내 시야는 비닐 벽 너머에 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비닐 벽에는 문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는 이런 어이없는 유머를 사랑한다. 실루엣으로 존재하는 저 어린아이는 무서울까 즐거울까. 다행히 나는 사진을 찍은 작가님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 속 공간에 대하여 들을 수 있다. 이야기를 듣기 전 나는 당연히 비닐 벽이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전시장에 동선을 유도하는 임시 구조물 이었다.

 

 

 

6.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아니. 나는 비닐 벽이 동선을 유도하느라 세운 임시 구조물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는 ‘임시’ 구조물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예술 작품처럼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영원함을 지향하지 않고, 그저 전시 기간에 맞춰 생겼다가 사라지는 가벼움이 마음에 든다. 이제 이 공간에는 아파트가 지어졌다고 한다. 아파트는 사라지기 쉽지 않겠지만 비닐 벽을 생각하면 숨통이 트인다. 언제고 다시 만들 수 있고 원하면 찢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것이다.) 어떤 걷기가 되었던 비닐 벽의 홀가분함을 기억하면 미궁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함께 걷기, 따라 걷기, 혼자 걷기

 

 

1.

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에서 내려 장바구니를 들고 집까지 걷는 그 짧은 거리에 나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장바구니를 잊어버린 날에는 종량제 봉투를 사서 담고 돌아와야 하는데, 얇아진 봉투의 손잡이 부분이 손바닥을 끊어 놓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엘리베이터 앞에 짐을 잠시 내려놓고 손바닥을 쳐다본다. 엄살을 조금 더 부려보자면 선명하게 그어진 빨간 줄을 보면 매 맞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머릿속에서 장바구니를 지우고 마트에 간 죄. 나는 몇 살까지 손바닥에 매를 맞았을까.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체벌을 했던 것 같은데. 카트에 물건을 하나씩 담을 때는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지. 나는 몇 가지 소란스러운 생각을 한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다시 짐을 든다. 그리고는 어리석게 종종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2.

나에게는 여러 가지 소지품이 있다. 가방 속을 들여다보면 메모장과 다이어리는 기본이고 전공 책과 시집, 그리고 그냥 재미있어서 읽는 책이 얽혀 있다. 전공 책, 시집, 그냥 재미있어서 읽는 책 이게 같은 책이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가끔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가방에는 책만 있지 않기 때문에 가방이 책보다 항상 더 커야하고 무겁다. 외출해서 모든 소지품을 다 쓰게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들고 다녀야한다면 내 결핍과 모종의 불안함이 내 가방을 부풀리고 있는 것 아닐까? 가끔 마음은 이렇게 직관적으로 자신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도 카페에 앉아서 옆자리에 큰 가방을 두고 쓰고 있다.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굳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가 카페에서 글을 쓰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간단한 메모를 할 수도 있지만 글을 쓰기는 힘들다. 희미하지만 자주 들리는 커피 머신 소리와 물소리, 나가는 사람들 들어오는 사람들이 섞이는 리듬이 나를 편하게 해주지만 그렇지 않아도 집중력이 짧은 내게 카페는 글쓰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시력보다 청각이 좋은 편이라 옆 자리의 사연이 너무 귀에 잘 들어온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사람들을 구경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리라 스스로 위로 하면서.

 

 

3.

길거리를 지나가다 큰 짐을 머리나 어깨에 얹고 가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는지? 종종걸음 같기도 하고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는 그 걸음이 시선을 잡아끈다. 무거운 짐을 들고도 그렇게 바람같이 걸을 수 있다니. 나는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남몰래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얹고 걸어본 적 있다. 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훨씬 편하다. 내 손바닥보다 내 어깨가 더 믿을 만 하다. 나는 몇 초 그렇게 할머니들을 따라서 걷다가 이내 슬그머니 다시 가방을 내려놓고 걸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진 속 할머니가 얹고 걷는 배추는 그렇게 무거운 짐같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나는 묘한 착시로 목 위로 머리 대신 배추가 얹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사진작가님도 나와 다를 바 없었던지 사진의 제목이 <cabbage head>이다. 친숙한 풍경이자 동시에 아주 기묘한 느낌도 받았다. 여러분도 르네 마그리트를 어디선가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의 그림에서 계속 반복되는 증산모를 쓴 남자의 이미지도 익숙할 것이다.

 

 

 

 

 

 

 

 

 

 

 

 

 

 

 

4.

증산모를 쓴 남자는 반복된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던가, 얼굴이 사과로 대체 된다거나,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반복될 뿐 개인적인 특성이나 사연이 있어보이진 않는다. <cabbage head>의 할머니도 아시아, 나이가 든, 여자라는 특성은 가지고 있으니 어떤 개인적인 특성이나 사연이 부각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증산모를 쓴 남자보다는 익숙한 대상이니 사진을 보고 기묘한 위트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증산모에 익숙한 관람객들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며 느꼈을 기묘함을 조금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림과 사진을 이런 식으로 일대일 비교를 해도 되나 싶지만 나는 날이 서있는 사진에서 가끔 회화를 느낀다. 친숙함과 기묘함의 줄타기가 느껴져서 나는 <cabbage head>사진이 좋다.  

 

 5.

배추를 잡은 손은 길에서 걷다가 잠시 생각에 빠져 이마를 긁는 손 같기도 하다. 배추를 나르다 배추를 잊어버리고 생각에 빠지다가 cabbage head가 된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길을 걷는 작은 영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배추가 머리라니. 머리가 배추라니. 그녀의 뒤에 서서 걸으면 머리를 중간에 두고 나란히 선 두 개의 배추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안도한다. 하지만 머리가 배추가 아니라고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내 부족한 마음은 가방을 부풀리는데 머리가 배추가 아니기만 할까. 나는 사진을 보며 이런 이상한 생각까지 도달했다.

 

 

 

 

 

 

 

 

 

 

 

 

 

 

 

 

 

 

 

 

 

 

 

 

 

 

 

 

 

 

 

 

 

나비처럼

 

찢어진벽지(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그것은유계(幽界)에낙역(絡繹)되는비밀(秘密)한통화구(通話口)다.

이상, <오감도 제 10호 나비>

 

1.

내 인생의 베스트 영화를 뽑아달라는 질문에는 항상 답하기 어렵다. 하나를 고를라치면 다른 게 생각나고  한참을 저울질을 하다가 질문에 답을 놓치기 쉽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베스트’를 뽑는 순간 나의 취향, 기준, 안목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라는 민망함도 있는 것 같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어제 내가 사는 곳에는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생각나는 영화는 무엇인가? 내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carol) 이다. 테레즈는 이제 막 사진을 찍기 시작한 사진작가이다. 그녀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하던 도중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을 만나게 된다.

1.

내 인생의 베스트 영화를 뽑아달라는 질문에는 항상 답하기 어렵다. 하나를 고를라치면 다른 게 생각나고  한참을 저울질을 하다가 질문에 답을 놓치기 쉽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베스트’를 뽑는 순간 나의 취향, 기준, 안목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라는 민망함도 있는 것 같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어제 내가 사는 곳에는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생각나는 영화는 무엇인가? 내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carol) 이다. 테레즈는 이제 막 사진을 찍기 시작한 사진작가이다. 그녀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하던 도중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을 만나게 된다.

2.

이처럼 무책임하고 뻔한 플롯 요약이 어디 있나 싶겠지만 나는 여러분이 이 영화를 직접 보길 원한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짜릿하게 만들다니… 케이트 블란쳇 앞에 서면 나도 갑자기 이상한 산타 모자를 쓴 백화점 점원이 될 것만 같다. 후에 테레즈와 캐롤이 평생을 함께 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테레즈는 캐롤를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항상 풍경과 사물만 담던 그녀의 사진에 이제 캐롤이 등장한다. 영화의 내용과는 조금 별개로 영화에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사진에는 사물보다 사람이,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훨씬 강력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3.

그렇다면 항상 연인을 찍은 사진이 더 좋은 사진이 되는 것일까. 헌데 나는 종종 그저 균열이 가있는 사물에 끌리고는 한다. 이 벽은 얼마 동안이나 그냥 그렇게 있었던 걸까. 시간이 꽤 흐른 것처럼 보인다. 균열의 모양은 벼락인 듯, 나비인 듯하다. 어떤 균열은 벼락같기도 하고 나비처럼 보이기도 하는 가. 벼락처럼 오는 균열은 이해하기 쉽다. 부딪치고, 싸우고, 시끄럽고, 통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나비처럼 오는 균열은 어떠한가. 알게 모르게 부드럽고 어여쁘게 오는 균열도 있을까. 시간이 오래 흐른 채 진행된 균열은 나비 같을 것 같다. 나비처럼 날개짓 하다가 조용히 내려앉을 것 만 같다.

4.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 유계에 낙역되는 비밀한 통화구이다.

 

사진을 보고 나는 바로 이상의 오감도 연작 중 제 10호 나비가 떠올랐다. 이상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찢어진 벽지와 찢어지지 않는 벽지가 애초가 다를 것 없다는 식으로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나 통화구가 있으니 그것은 오히려 비밀해진다는 것. 진짜 치명적인 비밀은 몰랐던 내용의 드러남이 아닌 여기저기서 날라 다니는 나비일 수도 있다. 이상이 그 비밀한 통화구를 벌리고 싶었는지 막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5.

영화 캐롤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시인 이상까지 와버렸다. 이렇게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 결국 내 머릿속에서 얽혀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만 같아서 부끄럽다. 하지만 이 세계에 비밀이 아닌 것이 없다면 대답이 아닌 것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좋은 글은 어디에나 있는 정답을 집어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뭐가 특별하다고

1.

내 인생의 베스트 영화를 뽑아달라는 질문에는 항상 답하기 어렵다. 하나를 고를라치면 다른 게 생각나고  한참을 저울질을 하다가 질문에 답을 놓치기 쉽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베스트’를 뽑는 순간 나의 취향, 기준, 안목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라는 민망함도 있는 것 같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어제 내가 사는 곳에는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생각나는 영화는 무엇인가? 내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carol) 이다. 테레즈는 이제 막 사진을 찍기 시작한 사진작가이다. 그녀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하던 도중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을 만나게 된다.

2

당신도 이런 사진을 찍어본 적 있을 것이다. 웅덩이에 고인 사물들이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사진은 왜 찍게 되는 것일까. 뭐가 특별하다고 … 하지만 비가 마르면 곧 사라질 모습이긴 하니 찍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페인 여행을 가서 그런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친한 언니는 내 트렁크에 기어코 필름 카메라를 넣어 주었다. 요새는 핸드폰 사진도 잘 되어있는데 짐 무겁게 왜 굳이 필름 카메라를 써야하는지, 출발할 때 까지 만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에 도착하고 무거운 트렁크를 숙소에 넣어 두자 나는 비로소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거추장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카메라를 손에 쥐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정말로 여행을 (그것도 유럽을!) 왔다는 생각이 몸으로 들었던 것이다. 현지 사람들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아시아 여행객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가까워오자 나는 울적해지기 까지 했다. 언제 다시 스페인에 와보나, 다시 유럽에 온다 해도 다른 나라를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걷던 중에 아침에 내린 비로 웅덩이에 고인 건물 사진을 찍었다. 그냥 건물 사진을 찍는 것이 훨씬 예쁘고 잘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갑자기 센치해지고 우울해지는 이 순간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3.

순간의 느낌 말고도 웅덩이에 비친 그림은  이 세계와는 닮았지만 묘하게 조금씩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 같기도 하다. 웅덩이를 밟으면 곧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 실제로 밟으면 신발이 더러워질 뿐이겠지만, 나는 이 느낌에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고 말한다.  사랑은 왜 빠지는 것일까? 사랑에 빠진다 …… 이 문장에는 어쩐지 의도치 않게, 예상치 못했다는 난처함이 서려있다. 수동적인 느낌으로 어딘가에 빠져 들어왔다는 느낌. 

4.

아무리 웅덩이를 밟아본들 신발과 바지 밑단이 더러워질 뿐이다. 더러워진 바지를 벗고 세탁기에 넣는다. 나는 요새 청소 후에 물건을 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마음이 더러워 졌다 해서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물건이라도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게는 오래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한번 눈길이 닿으면 상념에 빠지게 하는… 내가 버린 물건들이 가는 장소는 어디일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끝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아주 납작한 상태라고 짐작해본다.

5.

나는 아주 순간에만 존재하는 웅덩이 속 그네를 본다. 그네를 잘 타려면 발이 중요하다. 몸이 앞으로 갈 때 발을 힘껏 고 몸이 뒤로 갈 때 발을 다시 뒤로 붙이는 것. 그네의 방향과 발의 방향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멈추려면 반대로 하면 된다. 그네타기 정점에 이르면 공중에서 잠시 멈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무들과 시선이 같아지고 숨이 잠시 멈추는 느낌… 하지만 나는 무서운 속도로 뒤로 끌려간다. 마음이 들뜰 때가 그랬고 사랑에 빠질 때가 그랬다. 후에 부푼 마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서 다시 익숙한 장소와 리듬으로 돌아온다. 재밌게 놀았으니 더러워진 바지를 세탁기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웅덩이를 찍은 사진에 끌린다. 마치 곧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우리는 더블이다

1.

영화관과 카페를 부모님 없이 처음 가보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찰나의 어둠 속에 놓이면 설레임과 아늑함을 동시에 느껴졌다. 조만간 스크린에 영화가 나올 것이 분명하므로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어둠이 두렵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어둠을 긍정하게 된 계기라고 거창하게 말해도 될까. 잠들기 전에 막막한 어둠을 최대한 달콤하게 느껴보고자 했던 나름의 방편이었다. 여긴 영화관이다. 곧 스크린 위에는 영화가 상영될 것이다.

 

부모님 없이 영화관을 가본 후에 훨씬 나이가 들어서 나는 친구들과 처음 카페를 가게 된다. 집도 아니고 학교도 아닌 곳을 어른들 없이 방문한다는 사실에 꽤 설렜던 기억이 난다. 계산을 하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도 좋았고 나온 커피가 예뻐서 한참을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에 나는 어렴풋이 시간을 한가롭게 죽이는 기분을 느껴본 것 같다. 시간은 테이블 위에 있다가 어느 순간 슬며시 사라졌다. 카페 테이블 위에는 무엇을 올려두는 가. 컵과 컵이 올라가고 냅킨이 있으며 핸드폰을 올려두고 가끔 꽃병이 있다. 각각의 사물이 미세하게 위치를 바꾸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시간은 새벽이니까 다들 자고 있을까. 아직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고 지금은 안부조차 묻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새벽에 막연한 기분으로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막연하다. 어째서 기분은 종종 막연해서 해명할 길이 없이 누군가에게 불쑥 연락하고 싶은 것인지.

 

사진 속 두 남자는 실내와 실외에서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앉아 있다. 한 명은 핸드폰을 보고 있고 한 명은 맞은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건 통유리 창에 카페 이름의 일부로 보이는 DOUBLE이라는 글씨이다. 그들은 더블이라는 단어를 등에 두고 몸을 앞으로 굽히고 있다. 그들은 더블이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다름에 아파하기보다 같음에 아파한다. 우리 똑같이 이기적이라서 힘들다. 우리는 똑같이 이기적이라서 외롭다. 우리는 아주 잘 통한다. 더블이니까. 거기에 희망이 있고 절망도 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도 무심결에 더블이 될 수 있다. 내가 이 사진을 보고 중얼거린 말이다. 이기적인 사람의 새벽은 곤히 자고 있을 누군가를 깨우고 싶다. 그때 기억나는지, 그때 그 말은 무슨 의미였냐고 묻고 싶다. 다 알 것 같지만 잠든 사람을 흔들어 깨우고 싶다. 내가 이기적인가. 그래서 나는 외로워지는 것일까. 이제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것이다. 문득 어둠이 날 향해 달려오는 것 같으면 어쩌지. 영화관에서의 기억이 덜컥 어둠의 대한 두려움을 불러오면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우리는 더블이니까.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나타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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